멸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1968.1.21.사태 그 현장을 가다
멸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968.1.21.사태 그 현장을 가다 靑波산행겔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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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1 21사태 격전지 그 현장을 가다
1968.1.21. 사태 격전지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 외 30명이 자하문 일대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가, 습격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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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1968.1.21.사태 그 현장을 가다
◉ 산행일자 : 2022년 1월 20(목)
◉ 산행인원 : 동심회원 8명
◉ 산행코스 : 창의문-능금나무길-창의문정자-하늘교-하늘마루-하늘마루전망대-호경
암-일명김신조루트길-성북천발원지-숙정문안내소-발바위쉼터-와룡공원
◉ 산행시간 : 4시간 반(느림보 거북이 산행)
세월이 수상하다. 벌써 3년째 이어지는 중국발 괴질 코로나-19 때문에, 이제는 국민들이 지치다 못해 그로기(groggy)상태가 된지 오래다. 그렇다고 더 기가막힌 것은 이 코로나 정국이 언제 끝것이라는 예측이나 기대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다 나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오는 3월 선출하게 될 대통령선거 대선 정국이, 온통 좌편향 빨간색 일색이 되어, 언론이 앞장서 편파 방송을 떠들어대고 보도 하고 있다.
국가의 언론은 어느 한 쪽에 봐 편향되어 편파 보도를 해서는 일색이 절대 안된다. 내가 알기로 국가의 언론 기관이나 선관위는 스포츠 경기를 공명정대하게 심판하는 심판관들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공용방손 언론,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는 3월에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절대로 한 쪽 편에서 편파 보도, 편파 판정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걱정이다.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머지않어 공산주의가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 이유를 보면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의원들이 하나같이 중공과 북한을 흠모 추종, 충성 무리들이다.
사회 분위기가 이쯤되다 보니 선의의 국민들끼리도 ‘나는 빨갱이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빨갱이 김정은이 싫어요.’ 소리를 함부로 못하며 서로를 반목하게 만들고 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대선에 나서는 대통령후보자와 그를 추켜세우려는 정당의 힘, 머릿수 우위를 뽐내며 거의 협박 완력에 가까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다.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제명 못살고 죽을것 같다. 그 공포 분위기가 마치 1970년데 주먹세계 왕초들에게 협박 당하는 것 같은, 공포 분위기다. 그 과정에 모당 대통령 후보자와 관련 입에 오르내리던, 주위 사람들이 벌써 4명이나 소리 소문없이 죽어 나갔다.
사회 분위기가 이럴지언데, 더 웃기는일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체험하게 해준다며 국민들과 떡떠먹듯 약속을 하며 대통령이된 사람은 이런 상황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아뭇 소리 않고 관망만 하고 있다. 그꼴 보노라니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죄도 없이 숨죽이고 살수는 없다. 그래 가자. 서둘러 걸망을 챙겨메고 집을 나선다. 어디로갈까? 한참 궁리를 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1968년 1.21 사태때 31명의 북한 공작원 일당과 교전이 있었던 곳이다.
인천 부평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자하문 고개 “윤동주기념관”앞에 하차하니 오전 10시 45분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1968.1.21 북한이 청와대 습격을 위하여 31명의 김신조 일당을 남파하여 김신조를 생포하고 무장공비 전원을 사살하였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총경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은 잠시 최규식 경무관 동상앞에 묵념을 드린다. 그리고 곧바로 자하문을 지나, 1970년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았던 북악스카이웨이 고개길을 따라 오른다.
그런데 이틀전 내린 백설을 밟고 지나는데 발자욱을 옮길 때 마다.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서설(瑞雪)을 밟는 소리가 정겹다. 그러다 보니 우스게 소리로 파랑새 아우에게 죠크를 건넨다.
‘파랑새 넌 좋으냐 뽀드득 보드득 눈밟는 소리가.’하니 파랑새가 대답한다. 형 영락없이 ‘낙엽 밟는 소리’ 같아요 한다. 그렇게 두런두런 서설을 즈려 밟으며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벌써 북악스카이 웨이 팔각정이다.
오랜만에 오른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전망처에서 건너편 북한산국립공원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보현봉, 형제봉등 조망이 일망무제(一望無際)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배낭도, 마음도 내려놓고 산이 주는 보약(補藥)을 흠뻑 마시며, 호연지기(浩然之氣) 명상에 젖어 본다.
그러다 보니 벌써 정오다. 우리는 서둘러 전방 보현봉 방향을 배경하여 단체 사진과 기념 사진을 찍고, 저 높은 하늘전망대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른다. 하늘전망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오른 몇몇 사람들이 요기를 하고 있다. 이때 시간이 오후 1시다.
우리 일행들도 가던길을 멈추고 컵라면에 각자 지참해온 간식 거리로 요기를 한다. 그리고 멈춘자리를 뒷 정리하고 우리는 다시 1.21사태 당시, 김신조 일당 31명과 최접전을 벌였던 “호경암”을 오른다. 호경암 정상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조심조심 암릉을 내려서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호경암을 올려다 본다.
거대 호경암에는 당시의 격전 상황을 말해주듯, 50여발의 총탄 흔적이 바위에 흰색 페인트로 표시되어 그날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날의 역사 현장을 보노라니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아리다.
1968.1.21. 사태 격전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 외 30명이 자하문 일대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가, 습격의 실패 교전이 시작되자 구진봉과 성북동 뒷산 방향으로 분산 도주 하다가 우리 군 33대대 2중대는 호경암 일대를 계속 추적 수색하던 도주하던 적을 발견 치열한 교전 끝에 성북동 뒷산 구진봉 일대에서 적 3명을 사살한 곳이다. 호경암은 이 지역에서 치열했던 상황을 증명해주듯 바위에 오십여 발의 탄 흔이 남아 있어, 북괴의 잔악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 우리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체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호경암에 장병들로 하여 응 하여금 특정 지역 경계근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실증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을 하게 되었다.
54년전 치열했던 격전지 현장을 돌아보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난다. 2020년 9월 22일 서해 최북단 소연평도 어업지도선을 타고 근무중 실종된 공무원을, 빗 때문에 고민하다 월북을 하다 북측의 총격을 받고 숨진 것이라고 폄훼하며 북한군 수뇌부에 단 한 마디, 유감 표명도 못하고 어물쩡 넘어갔다.
그러니 졸지에 집안의 가장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이 얼마나 통한이 서렸을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도 국가는 공무원에 대한 보상이나 예우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다 고등학생 아들이 국민청원을 내가 대통령이 공무원 사인에 대한 원인규명 약속하며, 고등학생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기다렸건만, 대통령이 이를 지키지 않어 유족 측이 반납 하려는데, 왜 경찰 병력이 유족측 발길을 가로질러 막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러다 보니 유족은 어쩔 수 없이 문재인 태통령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길 바다에 버려두고 돌아가야 했다. 그 가슴 아픈 뉴스를 보고 또 다시 봐도 한심하다. 아니 내가 분해서 울화통이 터진다. 그러다 보니 목구멍에서 나도 모르게, 절로 ‘이게 나라냐’ 소리가 난다.
이렇게 지금 우리나라는 온 나라가 노골적으로 좌편향 공산화 길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54년전 ‘1.21태 뼈 아픈 현장’을 돌아본 감회가 새롭다. 상 돌아가는 세태가 하수상하다. 산행길 논설이 너무 길어졌다. 이젠 하산이다.
우리는 호경암에서 일명 김신조루트길을 따라 내려오다, 성북천 발원지도 지나고, 숙정문 안내소를 거쳐 말바위 쉼터, 와룡공원에서 이날의 산행을 모두 마치고 귀가를 한다.
북한산 유래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등록일 : 2022-01-22 10:31:33조회 : 729